Page 54 - 고경 - 2019년 5월호 Vol.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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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때 스승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그것’이 쏜다는 말, ‘그것’이 명중시킨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아니요. 도대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
겠습니다. (…) 제가 활을 당기는 것인지, 아니면 활이 저를 최
대의 긴장으로 당기는 것인지. 아니면 표적이 저를 맞추는 것
인지. ‘그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면 정신적이고, 정신의 눈으로
보면 육체적인지. 또는 둘 다인지. 그도 아니면 둘 중 아무것
도 아닌지. 활, 화살, 표적, 그리고 저 자신, 이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어서 더 이상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분리하려
는 욕구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활을 잡고 쏘는 순간 너무도 맑
고 명료하며, 그저 우습게 느껴지기….”
제자의 말을 끊으며 스승이 말했습니다.
“방금 마침내 활시위가 당신의 한가운데를 꿰뚫고 지나갔습
니다.”
신비주의적 색채도 다분한 대화입니다. 위 대화 내용 가운데 ‘그것’이
쏘고 ‘그것’이 명중시킨다는 것이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인지, 저로
서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타력’으로 이해합니다. 다소 긴
인용을 한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타력.
불교 신앙의 형태를 두 가지로 대별하면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이 될
것입니다. ‘자력문’, ‘타력문’이라고도 합니다. 전자는 스스로 열반을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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