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2 - 고경 - 2019년 5월호 Vol.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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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승랑은 삼론학에 정통한 학승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임종이
다가오자 ‘태어나서 죽으나, 본래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내용을
담은 「사불포론死不怖論」을 지어 생사에 초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스님
은 세수 75세의 나이로 결가부좌를 한 채 좌탈입망坐脫立亡할 만큼 수행력
도 깊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행적을 미루어볼 때 문자에만 집착하는 교
학승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철 스님의 평가이다.
삼론종의 집대성자 가상길장
삼론학을 대성시킨 길장(吉藏, 549~623) 스님은 승랑 대사에 대한 존경
과 신뢰가 높았다. 그는 승랑을 ‘섭령 대사攝嶺大師’ 혹은 ‘섭산 대사攝山大
師’라고 부르며 존경심을 드러냈다. 자신이 삼론학을 정립함에 있어 지대
한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삼론종은 유식학을 토대
론 한 법상종이 대두하면서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럼에도
길장의 삼론학은 한·중·일 삼국으로 전해져 불교학 발전에 기여한 것
으로 평가받고 있다.
길장은 어려운 논서를 집필하며 중국에서 활동했지만 그는 중앙아시
아 출신이었다. 그의 조부는 안식국安息國에서 중국으로 이주해 온 이민
자로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다. 불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탓에 어려서부
터 불교와 인연이 닿았고, 아버지는 당시 명성이 자자하던 진제 삼장에게
아들을 데려갔고 이 때 길장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구마라집, 현장, 불공
과 함께 중국의 4대 역경승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나아가 진제 삼장은 인도 유식파의 무착과 세친의 학설을 번역하고 체
계화하여 섭론종攝論宗의 개조로 추앙받기도 했다. 서북인도 출신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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