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4 - 고경 - 2019년 5월호 Vol.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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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 삼장은 양 무제의 초청을 받아 남중국으로 건너와 역경 불사에 몰두

           하는 중이었다. 길장 역시 중앙아시아 출신이었고 독실한 불자 집안이었
           다. 이와 같은 공통분모가 두 사람을 단단하게 이어주는 정신적 고리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교와 인연을 맺은 길장은 불과 12살의 나이로 흥황사에서 법랑의 강

           의를 듣고 감명을 받아 이듬해에 출가했다. 구족계를 받을 때까지 불교학
           에 계속 몰두하면서 점차 길장의 명성은 높아져 갔다. 정치적 격변을 거

           쳐 수隋 나라가 등장하자 길장은 가상사嘉祥寺로 들어가 7~8년간 삼론학
           을 연구했는데 ‘가상 대사嘉祥大師’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했다. 나중에

           수양제의 칙명으로 혜일사와 일엄사에 주석하며 삼론과 『법화경』 연구에
           몰두했다.

             길장은 중국 제일의 찬술가로 꼽힐 만큼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현존
           하는 것만도 26부 110권에 달한다. 『삼론현의』, 『중관론소』, 『이십문론

           소』, 『백론소』, 『이제의』, 『화엄경유의』, 『유마경유의』, 『금강경의소』, 『법화
           경의소』 등 초기대승 불교와 삼론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일생의 저작을 불태운 길장 스님


             길장은 삼론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성철 스님은 “문자에만

           치중하여 실제로는 마음을 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며 승랑에 대한
           평가와는 사뭇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삼론종의 종지에 있어서 공을

           설하고 『중론』을 근본 뜻으로 삼았지만, 『중론』의 깊은 뜻을 바로 보았다
           고 취급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길장은 천태사상을 집대성한 천태지의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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