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5 - 고경 - 2019년 5월호 Vol.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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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견해에 확신이 깊었다. 스스로 용수의 근본 뜻을 잘 계승했으며, 자신
의 논서를 통해 이를 충분히 피력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자긍심은 천태의 저작을 만나면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그는 ‘불
법의 정점에 어느 정도 다가가다 말았을 뿐, 부처님의 근본 뜻을 알지 못
했으며, 『중론』을 바로 보지 못했다’고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이에 길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저작을 찾아내 불
사르며 자신의 오류를 인정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지향하는 선승이라
면 몰라도 일평생 문자를 통해 진리를 추구했던 학승이었기에 그의 행동
은 매우 이례적이고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우선 깊은 인간적 고뇌와 좌절
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중관불교의 진의眞義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일
생을 바쳐 연구하고 집필한 내용이 본지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는 것
은 엄청난 자괴감을 불러왔을 것이다. 무엇보다 천태지의 저작을 통해 그
의 천재성에 대비되는 자신의 오류를 확인하고 깊은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 좌절과 아픔은 자신의 저작을 용납할 수 없게 만들었
고 급기야 그것들을 모두 불태우는 행동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는 진리를 향한 경건하고 진솔한 태도도 엿볼 수
있다. 일생 삼론을 연구했고, 수많은 저술을 남긴 마당에 자신이 옳다고
고집할 수도 있을 법 했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솔직히 시인함은 물론
잘못된 저작을 불태우는 과감한 실천까지 보여주었다. 자신의 한계를 받
아들이고 자기가 세운 학설을 철회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
다. 일생에 걸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고, 제자들과 자신을
후원해 준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장은 자신이
감당해야할 부끄러움 보다 정법正法의 유통을 더욱 소중한 가치로 생각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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