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0 - 고경 - 2020년 1월호 Vol.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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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만세라의 마애법칙(사진 1)과 탁실
라의 그리스식 고대도시 유적인 시르캅Sirkap 탑 유적(사진 2)에서 발견된
마애법칙 제4장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쿠샨제국이 서북 인도를 중심으로 인도를 통일하기 이전부터 이미 이
지역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지역이기 때문에 이를 감안한 정치활동
이 있었고, 불교 역시 다양한 종교와의 대화가 가능한 시대적 상황을 맞이
하고 있었다. 물론 그 결과는 불교사적인 관점과 현존하는 유적 및 유물의
양상으로 보았을 때, 쿠샨제국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되기는 하지만 말이
다. 때문에 불교가 다양한 영향을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위에서 언급했던
‘중계무역’의 장場으로써 서북인도의 역할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아쇼카왕 시대부터 이미 다민족 사회가 정립되
었던 서북인도는 쿠샨제국에 이르러 영향력은 극대화된다. 그렇다면 어
느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했을까?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돈’이
다. 중계무역이니만큼 실물로 거래하는 것을 지양하고 바로 화폐를 이용
한 거래를 활발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화폐를 통해 어느
지역까지 쿠샨제국의 영향력이 발휘되고 있었는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쿠샨제국에서 사용하던 화폐는 황제의 등극과 함께 자주 바뀌는 경향
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등극한 황제의 모습을 화폐에 새기는 일이 왕
왕 있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중계무역을 업業으로 한 국가이다 보니 화
폐의 질량은 주변국과 동일하게 맞추어야만 했다. 다시 말해서 금이나 은
으로 주조한 화폐의 질량이 주변국과 다르면 동일한 값어치를 매길 수가
없기 때문에 동일 질량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
은 이른바 쿠샨제국의 상권商圈을 가늠해볼 수 있게 한다.
박트리아 그리스 출신 왕이 사용하던 것부터 카니슈카를 필두로 한 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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