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9 - 고경 - 2020년 5월호 Vol.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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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u ma thal ’gyur ba, 쁘라상기까)를 뜻하는 티베트어 ‘우마랑귀빠’와 ‘우마

            탈규르와’라는 용어도 창안되어 정착됐다. 파찹의 제자들이 활동하자 유
            가행중관자립파의 지위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관자립파가 세속

            제 분상分上에서 인식(유가행파)과 외경(경부행파)의 존재를 인정하고, 승의
            제 분상分上에서 부정하는 것은 에둘러 본

            질을 설명하는 방식에 가깝다. 조금씩 이
            해해 정상에 올라가는 방법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유
            가행중관자립파가 400년 동안 티베트에서

            환영받아온 원인 가운데 하나가 이것일 수
            있다.

              반면 중관귀류파의 방식은 빙빙 둘러 설
            명하는 요로설선繞路說禪을 비판하고 곧바

            로 본질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개념
            화된 지식과 언어가 오히려 사람들을 호도

            할 수 있다며 곧장 본성本性을 철견徹見해
            진제를 체득하도록 하는 이 방식도 가유假

            有는 인정한다. 주의할 것은 중관자립파들
            역시 중관의 견해와 입장을 공유했다는 점                        사진 10.  『불교논리학의 향
                                                               연』, 불교시대사.
            이다. 그들은 (『근본중송』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해석상의 문제, 나아가 용수의 문헌을 어떻게 설명하고

            교육할 것인가에 대한 절차상의 문제에 대해 귀류파와 다른 입장을 가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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