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9 - 고경 - 2020년 5월호 Vol.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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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에 싸인 채로 보관 중이었다. 후령통을 감싼 황초폭자를 열자, 쪽물을
들인 비단 천에 붉은 글자로 쓰인 「조성기」가 드러났다.
후령통을 감싼 채 황초폭자 안에 싸여 있던 보살상을 중수한 자료를
보는 순간, 상원사 문수 동자상에서 발견된 1599년 중수기와 짝을 이룬
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 필자가 쓴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기록 연구』(서
울:불광출판사, 2018)를 가지고 갔기 때문에 상원사 문수 보살상의 기록과
대조해 보았다. 상원사의 경우 ‘童子文殊一尊, 老文殊一尊’이라 했고 보
현사의 경우 ‘老文殊佛像一尊, 童子文殊像一尊’이라고 해 동자 문수와 노
문수의 차례만 다르게 표기했다(사진 4). 또한 「보현사중수기」에는 노문수
보살상을 ‘노老문수 불상’이라고 표현했다.
보현사 목조 보살상(사진 5)은 고개를 앞으로 숙여 옆에서 보면 고창 문
수사 문수전의 문수 보살상처럼 나이든 노승을 떠올리게 한다. 상원사
문수 동자상은 오른손을 위로 들고 있다면, 보현사 문수 보살상은 왼손
을 위로 들고 있어 서로 대칭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상원사 문수 동자상
은 어린 아이의 당당함이 느껴진다면, 보현사의 노문수 보살상은 참선에
든 노스님을 연상시킨다.
두 보살상이 1466년 함께 조성되었는지 현재로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1599년 중수 당시에는 함께 상원사에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보현사의 노문수 보살상은 대대적인 수리를 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노
승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어깨에까지 내려오는 머리칼과 신체를 장
엄했던 장신구가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보현사의 노문수 보살상으로 추
정되는 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향후 발표될 논문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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