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3 - 고경 - 2020년 6월호 Vol.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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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이르니, 중국에서 실로 얻을 것이 없습니다[我國文物禮樂興行已久, 商
            舶絡繹, 珍寶日至, 其於中國, 實無所資].”고 한 대목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고려
            사』 1091년 6월 기사에는 송 철종哲宗이 고려 사신 이자의李資義 등에게 고

            려에 선본善本 책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책을 구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는

            데, 이를 통해서도 고려인들의 문화적 자부심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차 문화의 성쇠는 불교와 그 축을 함께하며 고려 색을 띤 독특한
            문화 형태를 드러냈다. 그러므로 불교계가 왕과 종파 간의 친소親疎에 따

            라 교세가 영락하였다 하더라도 승원의 막강한 경제력과 왕실의 후원, 차

            를 주도했던 승려들의 수준 높은 차의 안목은 11-13세기 고려 차 문화를
            꽃피운 동원動源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11세기 인물 의천이 남긴 차에 대
            한 기록은 그가 고려 불교에 미친 영향력을 고려해 볼 때, 중요하게 다뤄

            야 할 자료라고 생각한다. 『대각국사문집』에 차와 관련된 것은 다시茶詩 3

            수와 표表 1편이 남아 있어 그의 차 세계뿐 아니라 승원의 다풍茶風, 송과
            의 문물 교류 등을 규명할 수 있으
            리라 생각한다.

              의천은 문종의 4남으로 왕족이

            었다. 그가 영통사 경덕국사 난원
            (爛圓, 999-1066)에 출가한 것은 11
            세 때이다. 교학 연구에 치중했던

            그는 불교 전반에 높은 식견을 갖

            췄고, 노장老莊이나 유가에도 깊
            이 천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화
            엄이 교학의 중심이라 여겼던 그

            는 의상뿐 아니라 원효가 주창했               사진 2. 영통사 대각 국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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