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2 - 고경 - 2020년 8월호 Vol.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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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많은 학자들의 바람이었다. 유식 불교의 이
                                   러한 이중의 신분은 동서 문화의 대립에서 유
                                   리한 위치를 점할 조건이었다.”는 것이 당시 유

                                   식 불교를 보는 근대 지식인들의 공통된 인식

                                   이었다.


                                     태허와 구양경무



           사진 1. 장태염.
                                     유식 불교 부흥의 계기는 여러 번 언급하였
           듯이 근대불교 부흥운동에 앞장선 양문회이다. 양문회가 창립한 기원정사
           에는  승속  양계의  법상유식학을  대표하는  태허와  구양경무가  있었다.

           1910년 양문회는 불학연구회를 세워서 학문 연구를 촉진하고 선종의 종지

           를 규합하였고, 유식 불교가 “말법 시기의 폐단을 구할 양약”이라고 선언
           하였다. 양문회의 문하에는 많은 인재가 모여들었는데, 유식 불교에 뛰어
           난 인물들로는 구양경무歐陽竟無, 장태염(章太炎, 사진 1), 손소후孫少侯, 매광

           희梅光羲, 이증강李證剛, 산약목刪若木 등이 있었다.

             출가자 가운데 유식 불교를 깊이 연구했던 이는 불교 혁신운동의 태두
           인 태허이다. 그는 일찍이 유식학을 깊이 연구하고 8종 평등을 주장하였
           고, 어느 한 종파에만 얽매이지 않고 불법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특히 유식

           불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태허의 『전서全書』 중에서 유식 불교만 논한

           것이 5책, 50여 편이고, 그 중 중요한 『법상유식학』은 당시 영향이 매우 컸
           다고 한다. 물론 태허는 유식 불교보다 『대승기신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중국불교가 불교의 핵심을 파악하였다는 입장을 취하였던 인물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태허가 세웠던 무창, 민남, 한장교리漢藏敎理 등의 불학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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