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1 - 고경 - 2020년 10월호 Vol.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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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을 망라해 보면 기록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함양 지역처럼 백
            성의 경제적 부담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함양 지역은
            원래 차 주산지였다. 이는 1454년에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진주

            목 함양군」편에 “토산은 은어, 작설차, 죽순, 감[土産銀口魚雀舌茶竹笋柿]”이라

            고 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454년 이전의 함양 지역은 차를 토
            공한 지역으로 주요 차 산지였던 셈이다.
              그런데도 김종직이 함양에 부임한 1474년경에는 차가 생산되지 않았다

            는 점이다. 원래 『세종실록지리지』는 1454년에 완성되었다. 이를 근거로 생

            각해보면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부임한 해가 1474년이었으니 불과 20여 년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그렇지만 함양 지역에서 차가 생산되지 않았던 연
            유는 무엇일까. 고려 말, 과도한 차세로 인해 차산지의 군민들이 몰래 차

            나무를 불 질러버렸던 사례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 현상은 조선 전기에도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물론 차 생산이 급격하게 줄어든 이유는
            경제력이 미약해진 사원의 차 생산량 축소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럼 음다 풍속이 미미해지는 경향을 보인 시기인데도 토공으로 납부된

            차는 어떻게 활용되었던 것일까. 그 답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얻을 수 있는
            데, 특히 태종 2년(1402) 5월 기사에 “축맹헌·단목지 등이 (중국의) 수도로
            돌아가니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교에서 전송하였다 … 그들이 돌아감

            에 이르러 다만 석등잔, 인삼, 작설차를 받아들였다[祝孟獻端木智等還京師,

            上率百官餞于西郊 … 及其還也. 但受石燈盞人蔘雀舌而已].”고 한 것이나 세종 10년
            에도 중국 사신에게 차 일곱 근을 주었다는 기사가 당시의 차 용도를 가늠

            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리고 세종 28년(1446) 주다의(晝茶儀, 왕과 왕후의 혼백
            을 모신 사당이나 왕릉에서 낮에 올리는 제사 의식)에서 차를 올린 기록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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