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8 - 고경 - 2020년 12월호 Vol.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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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철자가 같은 단어가 한 문장에 등장하더라도 어떤 술어가 그 단
어와 상입의 연관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단어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 뿐이
아니다. 이 상입의 연관관계에 의해 “다리를 건너오다”나 “다리가 아프다”
라는 문장은 ‘다리’나 ‘건너오다’나 ‘아프다’라는 각각의 단어가 갖지 못하는
문장의 의미를 갖추게 된다. 이는 한편으로는 각각의 단어가 서로 침투하
면서 각각의 단어에는 없던 문장의 의미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장 전체의 의미가 각각의 단어에 스며드는 것이기도 하다.
연기 - 상입과 창발의 보편성 상입과 창발의 관계는 앞에서 논의한
예뿐 아니라 아주 보편적으로 성립한다. 이는 우선 인과 관계에서 언제나
성립해야 한다. 씨앗과 싹의 관계가 한 예다. 씨앗이 있어야 싹이 나오지
만, 씨앗이 있다고 싹이 반드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싹이라는 과果가 성
립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수분, 토양, 햇빛 등의 무수한 연緣이 씨앗이라는
인因에 침투해야 한다. 이 상입에 의해 물은 이전의 물이 아니고 씨앗은
이전의 씨앗이 아닌 것으로 변한다. 이 상입에 따른 변환으로 씨앗과 물
은 싹으로 새롭게 나타난다. 이는 상입과 창발이 개입돼야만 연緣의 도움
으로 인因이 과果로 변하는 시간적 인과의 연기緣起가 성립한다는 것을 보
여준다.
잎에서 논의한 원자와 분자, 글자와 단어, 단어와 문장의 관계는 상호 연
관과 의존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연기緣起를 보여준다. 이 연관과 의존의 관
계가 끝없이 전개되는 세계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원자가 모여 분자를, 분
자가 모여 생명물질을, 생명물질이 모여 세포를, 세포가 모여 생명을 이룬다.
이 생명 중의 하나가 인간이다. 개별적인 인간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그 사
회가 문화를 만들어내고 문화의 누적적 발전으로 문명이 형성된다. 이 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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