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2 - 고경 - 2021년 1월호 Vol. 93
P. 132

도였으니 절의 규모는 작았을 것이고, 그 이후 선종이 신라 왕실과 지방호
           족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사세가 조금씩 확장되다가 고려에 들어오면서 본
           격적으로 커졌다고 보인다. 이렇게 하여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세

           조世祖대에 이르기까지 진전사에는 많은 당우들이 대규모로 축조되고 선

           종사찰의 중심으로 왕성하게 그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一然, 1206-1289) 선사도 이곳에서 대웅 장로大雄長老에게 구족
           계具足戒를 받았다고 한다(사진 4).

             『삼국사기』를 보면, 도의선사가 신라로 귀국하여 활동한 사실에 관한 내

           용은 없다. 그 무렵 신라에서는 가뭄과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고
           자손들까지 팔아먹는 일이  발생했고, 웅천 도독 김헌창金憲昌이 자기 아버
           지 김주원金周元이 왕이 되지 못했다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잡혀 죽고, 또

           그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여주 고달산高達山에서 도적떼들과 다시 반란을 일

           으켰다가 잡혀 죽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왕실에서는 당나라로 국비유학생
           12명을 보냈다. 역사에서 이 시기는 선덕왕이후 신라 멸망까지 150여 년간
           20여 명의 왕이 왕위쟁탈전을 벌였다고 기록된 시기이다. 이런 권력투쟁의

           혼란 속에 장보고(張保皐, 787-846)도 왕위쟁탈전에 끼어들어 군대를 동원

           하여 839년에 김우징金祐徵을 신무왕神武王으로 옹립하고 벼슬을 차지하였
           다가 문성왕文聖王 때 다시 반란을 일으켰는데, 846년에 신무왕 옹립의 반
           란 동지였던 염장閻長에게 목에 칼을 맞고 죽었다.

             이 무렵 당나라에서는 도교를 신봉한 무종(武宗, 814-846)이 845년(會昌 5)

           에 불교를 없애버리려고 한 도사道士 조귀진趙歸眞의 사주를 받아 회창법
           난會昌法難을 일으켰다. 당시 불교 승려 90% 정도를 모두 환속시켜 버리고
           장안의 사찰을 제외한 전국의 불교 사찰을 모두 불태워 없앴다. 살아남은

           승려들은 심산유곡으로 피하였고, 신라의 도당유학승渡唐遊學僧들은 외국



           130
   127   128   129   130   131   132   133   134   135   136   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