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7 - 고경 - 2021년 1월호 Vol.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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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 조정에서는 유교를 숭상하고 도道를
                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도구로 삼아 300의 군
                현郡縣에 모두 부자(夫子, 공자)의 묘廟가 있어 멀거나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봄에는 거문고를 타고 여름에는 시를 읊어서 이단의

                학學인 도교가 마침내 전해지지 않았고, 오직 승려들만 한갓 오
                래된 절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깊은 산골짜기의 우
                거진 숲속이나 큰 늪 가운데는 호랑이와 표범의 소굴이기도 하

                며 못된 무리들이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여, 부서簿書가 이르지

                도 못하며 소송이 있지도 아니하고 병식兵食을 의뢰하지도 못한
                다. 그래서 비구대중으로 진정시켜 길이길이 큰 재난에 보호받
                게 하니, 대체로 승려들이 참여하여 거기에 힘을 썼다. 이것이

                『범우고梵宇攷』를 짓게 된 까닭이기도 하며, 또한 종산서원鐘山

                書院에 불교서적을 두어 주자朱子를 위해 게시해 두고 보았던
                남은 뜻을 모방한 점이 있는 것이다.”



              왕명으로 『범우고』를 편찬하고서 정조正祖가 남긴 글이다. 왕은 스님들

            이 궁벽진 산골의 무지몽매한 백성을 교화하고, 외적으로부터 산천을 방
            비하며, 조선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는 공덕이 있는 팔도의 사찰과 스님들
            을 기록으로 남겨 조선의 소중한 재산으로 삼고자 했다. 불교적 신앙심이

            있는 왕은 아니었지만,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이후 남긴 공적을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이다. 이 글은 불교가 탄압받고 소외받았던 조선의 역사 속에
            서 그 가치를 기억하고 있는 우리 불교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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