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0 - 고경 - 2021년 1월호 Vol.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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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義玄, ?-867)은 바로 황벽희운의 제자이다. 가히 선가 역사상 백화제방百
           花齊放이고 만화방창萬化方暢을 장식한 시대였다.
             선종이 이렇다 보니 사회에 대한 선의 영향은 계속 확대되어 갔고 사대

           부 관료들이나 문인들과도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문인들과 관료들 가

           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종에 귀의하기도 했고, 유종원(柳宗元, 773-819)
           과 유우석(劉禹錫, 772-842)은 혜능의 비문을 같이 썼고, 말년에 용문석굴이
           있는 용문의 향산사香山寺에 들어간 백거이(白居易, 772-846)도 불광여만에게

           배웠고, 제상 배휴(裴休, 797-870)는 황벽희운에게 귀의했다. ‘시불’詩佛 왕유(王

           維, 701?-761)도 선사들에게 배웠다. 당나라 시대에 중국불교에서 선사들의 등
           장과 그들이 만들어낸 ‘선’禪에 대하여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그
           이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있다. 중국의 선은 인도의 선과는

           다른 것이고, 인도불교가 한어로 경전이 번역되면서 ‘중국불교’로 발전하던

           것이 중국의 오랜 도가道家적 기층문화와 결합하여 나타난 현상이라고 말
           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러한 당나라 불교계의 변동으로 신라에 선종이 들어오기 시

           작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화두話頭를 들고 참선을 하는 ‘간화선’

           看話禪 또는 ‘공안선’公案禪이라고 하는 것은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頤,
           1033-1107), 주희(朱熹, 1130-1200) 등 성리학의 맹장들이 활약한 남송南宋시
           대 와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신라에 들어온 남종선에서 그 수행법이 어떠했는지가 궁금하

           다. 수행자들 간의 대화나 행동을 통하여 선수행이 있은 것으로 추측하기
           도 하지만 수행법이 구구했는지 아니면 일정한 형식이 있었는지 더 규명해
           볼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수행법이 결국 개인의 마음 수련과 공空의 깨달

           음에 그치는 것이라면 종교로서의 역할에서는 반만 하고 만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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