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4 - 고경 - 2021년 1월호 Vol.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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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의존한 것이기는 하지만 17세기 최고의 성리학자 송시열이 봉암
사에 들러 유숙할 때 가장 나이가 많은 노승(아마도 주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과의 몇 차례 응대를 통해 그를 ‘글 꽤나 읽을 줄 아는 중’으로 인상비평 하
는 대목이 있었는데, 이것을 보면 당시 주류 유자들의 불교에 대한 인식을
알만하다.
유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은인의 나라’인 명나라 사람들조차 그렇게 가
고 싶어 하는 산이 하필 금강산이라니 얼마나 약이 올랐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유자들 중에도 불교의 심오한 학문적 깊이에 감복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라, 당시 유자라고 모두 금강
산이라 부르는 것을 꺼렸던 것은 아니다.
이름이 주는 의미
금강산을 기록한 유산기를 보면 내금강은 표훈사, 외금강은 신계사가
유산遊山의 베이스캠프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유자들이 이
곳에 와서 유흥을 즐기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이 두 사찰에서도 탐
승 온 유자들이 유흥을 즐겼다는 기록은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데,
신계사는 만세루萬歲樓라는 이름의 문루가 남아 있었고, 표훈사는 능파
루凌波樓라는 이름의 문루가 전한다(사진 2·3). 이 두 사찰의 문루 이름은
누가 봐도 그 의미가 서로 사뭇 다른데, 두 사찰 모두 만세루나 능파루 이
외의 각각 다른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일제강점기 사진을 통해 두 사찰 문루의
건축형식을 살펴보면 표훈사 능파루는 정자에 가까운 건물이라고 할 수
있고, 만세루는 전형적인 사찰의 문루라고 할 수 있는데 참 공교롭다.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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