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7 - 고경 - 2021년 1월호 Vol.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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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입장에서는 성리학 지상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불간의
회통에 적극적이었지만, 유자들은 자신의 영향력 아래 사찰을 두고 즐기
러 오는 별장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스님들의 수행자다운 풍모에 감화 받은 유자가 불교를 존중하는 태도를 취
하고 탐승에 도움 주는 스님들의 고생을 안쓰러워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
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금강산 사찰의 처지
금강산을 벼르고 벼르다 유람한 18세기 한 관리의 기록을 보자. 장한철
(1744-?)은 『금강은유록金剛恩遊錄』에 자신의 금강산 유람을 소상히 적고 있
다. 당시 장한철은 양양에서 간성을 지나 고성, 통천, 흡곡을 통해 동북방
으로 이르는 교통로를 관할하는 상운역祥雲驛의 찰방察訪(역참을 총괄하는 관
리)이라서 그런지 금강산 지역에서는 유세 꽤나 했던 사람임이 분명하다.
유점사와 표훈사의 승려들이 가마 메고 나타나 장한철을 태웠으며, 유
점사에서 유숙할 때는 고압적인 자세로 이 절의 보물들을 보고 싶다고 하
여 여러 성보들을 내오게 하는 위력을 보였다고 스스로 적고 있다.
또한 장한철의 기록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 금강산의 사찰들은 술을
내놓아야 했으며, 흥이 고조되면 춤도 대신 추어야 했으며, 하물며 물놀이
도 대신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흥에 취해 시라도 읊게 되
면 그 시를 새겨 문루에 걸어 놓았어야 했으며, 절경의 바위에 남기고 간
그들의 이름은 물론 데리고 온 기생들의 이름까지 새겨놓아야 해서 스님
중에는 각수刻手의 기량을 갖춘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금강산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금강산이 워낙 많은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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