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8 - 고경 - 2021년 1월호 Vol.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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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이 한 번은 둘러보고 싶은 산이어서 다른 산이 비해 빈번했겠지만 전
           국의 모든 명산에서 아주 흔한 일이었던 것이다.



             문루 밖을 보는 유자, 문루 안을 사용하는 불교



             이때 술과 함께 차운韻하는 놀이는 아주 보편적인데, 그 흔적은 어지간
           한 사찰의 문루에 가면 다 남아 있었다. 지금이야 시판詩板이 많이 없어졌

           지만, 과거에는 추울 때 불에 땔 정도였다고 하니 …. 일제강점기 유리건판

           사진으로 전하는 해인사 구광루 내부에 걸려 있는 시판詩板을 보면 어느
           정도였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사진 6).
             이외에도 개인 문집들에 전하는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례도 있

           는데, 완주에 있는 대둔산 안심사 적설루에 올라 차운했을 것으로 보이는

           오언율시가 서로 시기를 달리하며 각각의 문집에 남아 있는 인물이 이이
           (1536-1584),  조헌(1544-1592),  이안눌(1571-1637),  김익희(1610-1656)  등이다.
           안심사 적설루는 당대 유명한 유자들이 놀러와 앞 사람의 시에 차운하며

           놀던 장소였던 것이다. 사찰에서 문루는 불교가 중생을 제도하는 의식을

           춤과 음악, 그림을 총 동원한 서사가 있는 예술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는 공
           간이지만 놀러온 사람들에게는 놀이터에 불과했던 것이다.



             불유佛儒의 회통은 불가피한 선택



             유자들의 유산遊山은 특히 조선후기에 크게 성행하였는데, 이렇게 유산
           을 즐기던 유자들은 산이라는 공간이 불교적 지명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

           을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깨뜨리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가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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