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5 - 고경 - 2021년 2월호 Vol. 94
P. 165

구마라집의 ‘실상무상’은 서역의 ‘희론의 지식’과는 다르게 묘한 사상적
             탄력성을 지닌다. 더욱이 이러한 ‘실상론’에 입각하면 앞에서 언급한 ‘사구
             백비’는 수정될 여지가 있으며, 실제로 구마라집이 번역한 용수龍樹의 『중

             론中論』, 『십이문론十二門論』, 제바提婆의 『백론百論』을 바탕으로 설립된 삼론

                                                                        2)
             종에서는 ‘이사구離四句, 절백비絶百非’를 제창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러한 반야학의 실상론은 이후 중국불교의 사상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
             쳤다고 하겠다.

               구마라집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중국불교의 흐름에 중요한 사상적 제시

             를 한 이들이 바로 승조僧肇와 도생道生이다. 승조는 흔히 스승인 구마라
             집과 함께 ‘중국 반야학의 비조鼻祖’라고 평가한다. 승조의 여러 작품 가운
             데 『조론肇論』에는 특이한 서술방식이 눈에 띠는데, 그것은 길지 않은 『조

             론』 가운데 97개 구절이 『노자』 혹은 『장자』와 일치하거나 그로부터 인용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서술은 바로 당시 시대사조였던 현학을 겨
             냥한 것이고, 직접적으로는 현학의 사유를 차용한 ‘격의불교’의 오류에 대
             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부진공론不眞空論』에서는 대표적인 격의

             불교의 ‘본무종本無宗·심무종心無宗·즉색종卽色宗’에 대한 오류를 비판하

             고 있으며, ‘비유비무非有非無’를 논증하는데, 이는 또한 곽상의 ‘즉유즉무’
             를 ‘실상무상’의 입장에서 한 차원 높게 논증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승
             조의 노력으로 ‘격의불교’는 점차 종식되었으며, 중국에서 본격적인 반야학

             이 전개되었다고 하겠다.

               한편 도생은 어려서 축법태竺法汰를 만나 출가하여 15세부터 강설하여
             강남에서 유명한 명사가 되었는데, 여산廬山 혜원慧遠의 문하에서 가제바伽



             2)  ‘離四句, 絶百非’는 吉藏의 『涅槃經遊意』, 『大乘玄論』, 『二諦義』 등에서 언급되고 있다.



                                                                         163
   160   161   162   163   164   165   166   167   168   169   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