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0 - 고경 - 2021년 2월호 Vol.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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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강론하며 계를 전할 수 있어야 대화상大和尙이라고 칭한다. 한학 초·
중급을 배워야 하고, 배우지 못하는 자는 환속하게 한다.
양문회가 이러한 불교교육에 활용한 경론들의 판본을 상세히 나열하고
있는 것을 보면, 종파와 관련 없이 전체 불교를 학습 대상으로 삼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구양경무 등이 사업 계승·발전
양문회는 금릉각경처에 불학연구회와 기원정사를 설치하여 개혁을 실천
하려고 시도하였고, 후대 불교도들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 이 사업은 이후
제자인 구양경무(歐陽竟無, 1871-1943)가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앞에서도 다루
었지만 구양경무는 양문회 서거 후 그의 후계자로 진경청, 진의 등과 함께
금릉각경처를 인계받았던 인물이다. 1922년 지나내학원을 세우고 많은 불
교 연구자들을 양성하였다. 구양경무는 “거사들의 규모가 방대하여 문하에
재사들이 많았다. 담사동은 화엄에 뛰어났고, 계백화桂伯華는 밀종에 뛰어
났으며, 여단보黎端甫는 삼론三論에 능통하였다. 유식법상의 학문에서는 장
태염, 손소후, 매힐운, 이정강, 붕양목, 구양경무 등이 뛰어났다.”고 당시 불
교연구에 전념하였던 이들을 거론하였다. 태허(太虛, 1889-1947)는 “기원정사
에 참여한 이들은 구양경무, 매광희, 석인산釋仁山, 지광智光 등 대다수가 현
대 불교의 중요한 인물들이었고, 나 자신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고 말했
다. 이들은 모두 청말 민국초기 중요한 불교학자들이고, 이 중에서도 태허
와 구양경무는 당시 불교사상계를 이끌어간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근대 중
국불교는 양문회의 불교교육과 사업 위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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