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4 - 고경 - 2021년 6월호 Vol.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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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었던 16세기의 역사학과는 근본적으로 차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즉 당
시 지식인들은 중국의 역사에 관심이 깊었던 반면 동국사東國史에 대한 관
심과 교육은 저조했다. 17세기의 역사학은 16세기와 같이 개인 학자에 의한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성리학 이해의 진전으로 주희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
鑑綱目』의 방식에 의해 역사를 재편찬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기도 했다. 아울
러 외침을 당한 위기 속에서 역사를 통해 애국충신 의식을 강화시키는 것
은 물론 조선의 영토와 군사적 요충지인 관방關防의 소재, 대외적 전투의 격
전장 등에 대한 역사지리학적 연구가 있었다.
이러한 자국사自國史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불교계의 저술 작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해안이 사적기를 찬술한 이후 18세기 후반에는 정약
용과 대둔사 승려들이 『대둔사지』를 찬술하고, 19세기에는 범해 각안梵海覺
岸이 『동사열전』을 찬술했다. 이러한 불교계의 현상은 조선 전기와는 뚜렷
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사실 고려 말 『삼국유사』가 일연에 의해 찬술된 이
후 조선 건국과 함께 불교탄압의 진행으로 불교계의 찬술 작업은 승려의
문집이나 경전 간행과 같은 최소한의 서적인출 이외에는 뚜렷한 성과가 없
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전란의 참여로 사회적 재평가와 지위의 향상은 불
교계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은 일반 역사서의 찬술과 함
께 동일한 역사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불교사서의 찬술을 가능하게 했다.
먼저 해안은 사적기 찬술을 통해 불교 탄압과 전란으로 폐허가 된 사찰
과 조선불교의 역사를 복원하고자 했다. 그는 고려 말부터 진행된 조정과
유학자들의 불교 탄압과 그로 인한 불교계의 암울한 현상들을 목격했다.
더욱이 왜란과 호란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사찰과 조선불교의 역
사를 살필 수 있는 전적典籍들을 없애버렸다. 해안은 이러한 불교계의 내외
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사명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사상과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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