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6 - 고경 - 2021년 7월호 Vol.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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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 - 『불국사고금창기』와 사적기>
『佛國寺古今創記』 『華嚴寺事蹟』 『大芚寺事蹟』
眞興王爲母只召夫人, 創寺度 是年, 眞興王爲母只召夫人, 是年, 眞興王爲母只召夫人創
僧, 鑄皇龍寺銅像丈六尊佛五 創興輪寺, 度人爲僧尼, 廣興 是寺及興輪寺, 度人爲僧尼,
萬七千五斤, 鍍金百二兩. 夫 佛刹. 末年剃髮僧衣, 自號法 廣興佛刹. 末年剃髮僧衣, 自
人因剃髮爲尼, 自號法雲子. 雲子, 又成皇龍寺鑄丈六銅像 號法雲子, 世稱菩薩, 又成皇
五萬五千七斤, 鍍金百貳兩. 龍鑄丈六銅像五萬五千七斤,
鍍金百二十五兩.
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요컨대 해안의 『금산사사적』, 『화엄사사적』, 『대둔사사적』은 그가 1612년
무렵에 찬술했던 『불국사사적기』가 그 저본이 되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사
실은 다음 인용문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표2는 『불국사고금창기』와 다른 사적기 기록을 비교한 것이다. 사료들
이 전하고 있는 기본적인 내용은 “진흥왕이 어머니 지소 부인只召夫人을
위해 흥륜사興輪寺를 창건하고, 황룡사皇龍寺 장육동상丈六銅像을 주조
하였으며, 만년에 출가하여 호를 법운자法雲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런데 이 내용은 불국사, 화엄사, 대둔사의 각 기록에 동일하게 보이고
있다. 그리고 『불국사고금창기』 또한 불국사의 창건을 법흥왕 때로 잡고
있으며, 진흥왕 때인 574년에 중창하였으며, 그 당시엔 사찰 이름이 ‘화엄
불국사華嚴佛國寺’·‘화엄법류사華嚴法流寺’ 등이었다고 했다. 따라서 『삼국유
사』에서 경덕왕 때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를 세웠다는 기록과는 엇갈리고
있다. 그런데 다른 모든 부분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답습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표3은 『불국사고금창기』와 다른 사적기에 인용된 『삼국유사』의 기록들이
다. 사적기에 보이는 다른 인용 자료에 비해 양적인 측면에서 『삼국유사』의
기록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내용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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