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6 - 고경 - 2021년 8월호 Vol.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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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도구로 삼아, 300의 군현郡縣에 모두 부자(夫子, 공자)의 묘廟가 있
어 멀거나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봄에는 거문고를 타고 여름에는
시를 읊어서, 이단의 학學인 도교가 마침내 전해지지 않았고, 오직
승려들만 한갓 오래된 절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깊은
산골짜기의 우거진 숲속이나 큰 늪 가운데는 호랑이와 표범의 소
굴이기도 하며 못된 무리들이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여, 부서簿書가
이르지도 못하며 소송訴訟이 있지도 아니하고 병식兵食을 의뢰하지
도 못한다. 그래서 비구대중比丘大衆으로 진정시켜 길이길이 큰 재
난에서 보호받게 하니, 대체로 승려들이 참여하여 거기에 힘을 썼
다. 이것이 『범우고』를 짓게 된 까닭이기도 하며, 또한 종산서원鐘
山書院에 불교 서적을 두어 주자를 위해 게시해 두고 보았던 남은
뜻을 모방한 점이 있는 것이다.”
『홍재전서』 권 56에 수록된 『범우고』의 ‘제문題文’이다. 정조는 불교에 우
호적인 왕이 아니었다. 즉위 후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표방
했고, 성리학을 진흥시키고자 했다. 반면 조상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원
당願堂을 철폐하였고, 스님들의 도성출입을 엄중히 금지하기도 했다. 이단
을 혁파하고 풍속을 바로잡아 교화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이 불교 억압
의 배경이었다.
정조는 『범우고』 제문에서 불교가 중국에서 전래 되었지만, 조선은 유교
를 숭상하여 도교는 자취를 감췄고, 불교는 승려들이 절만을 지키고 있을
정도로 이단이 쇠락했음을 전제하였다. 그러나 궁벽진 산골은 나라의 법
령과 제도가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하여 소송할 수 있
는 길도 없으며, 위태로운 상황에서 군대와 군량미조차도 의뢰하지 못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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