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7 - 고경 - 2021년 8월호 Vol.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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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이었다고 하였다. 다행히 스님들이 존
             립하여  최소한의  법령과  제도가  전해지
             고, 군대와 군량미를 마련하여 임진왜란

             과 병자호란과 같은 전란에 참여하여 나

             라를 재난에서 구해낸 것이라고 하였다.
             정조가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참
             여한 무학 대사나 휴정·유정과 같은 호국

             스님이라든가 왕실불교와 관련된 사찰에

             대해서 각별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
                                                     사진 1. 『범우고』 표지.
             이기도 하다.
               정조는 글의 첫 부분에서 “부서簿書는 옛날에도 있었지만, 예악禮樂이

             우선이고, 소송은 옛날에도 있었지만 교화가 실제가 되고, 병식兵食은 옛

             날에도 있었지만 풍속이 근본이 된다.”고 하였다. 요컨대 불교가 비록 이단
             이지만, 국가 운영의 기본이기도 한 예악과 교화, 풍속의 유지에 힘쓰는 바
             가 지대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더욱이 이러한 이유가 『범우고』를 짓게 된

             까닭이라고 하였으니 편찬 목적이 불교를 탄압하거나 승려에게 잡역雜役을

             부과하거나 잡공雜貢의 수취를 위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즉위 초 보여주었던 불교배척의 입장과는 달리 재위 9년에는 당
             시 불교계에 고질적인 병폐였던 스님들이 부담해야 했던 산성수호 부담금

             이었던 ‘남북한산성 의승번전南北漢山城義僧番錢’을 반감半減시켜주었고 재

             위 12년 7월에는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의 청으로 대흥사 청허 휴정의 사
             당에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을 내렸으며 즉위 16년 윤4월에는 석왕사에 ‘석
             왕釋王’이라는 사액을 내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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