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1 - 고경 - 2021년 9월호 Vol.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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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보광전.



             건립하고 비단과 금으로 치장을 하고 기물을 헌정하는 행위를 강력히 통

             제하였다. 당연히 귀족들은 이러한 조치들에 대하여 반발을 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의 재위 기간 중인 802년 순응順應과 이정利貞 두 화상
             에 의해 해인사海印寺가 창건되었는데, 이 해인사는 왕실에서 경영하였다.

               흥덕왕은 즉위한지 두 달 만에 장화章和 부인夫人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

             을 맞이하고 그 후에도 평생 후비를 두지 않는 삶을 살았다. 삶과 죽음의
             허망함을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삼아 청해진淸
             海鎭을 지키게 한 것이라든지 김대렴金大廉(?-?)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가 귀국할 때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와 지리산에 심었던 일도 흥덕왕 시대

             에 있었다. 물론 차나무는 그 이전에도 신라에 있었다. 그는 죽어서도 유
             언에 따라 장화 부인과 같이 합장되었고, 후사가 없이 죽자 사촌동생인 상
             대등 김균정金均貞(?-836)과 그의 조카이자 원성왕元聖王(785-798)의 아들인

             김제륭金悌隆이 왕위를 두고 궁궐에서 격전을 벌인 결과 김균정이 살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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