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5 - 고경 - 2021년 9월호 Vol. 101
P. 105
데, 이 정개라는 연호는 후백제 견훤이 사용한 연호이며 이로서 건립연대
가 910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중심
으로 하여 세력을 모아 신라와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던 때였음을 고려
하면 이런 기록은 견훤이 편운 화상의 부도를 건립하여 주면서 실상산파
를 자기 세력권내로 포섭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렇다면 전후 사정으로 보건대, 수철 화상의 세력이 신라의 왕실 편에 섰
던 반면 편운 화상의 세력은 견훤의 편에 섰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음광 화상은 수철 화상 비碑를 세울 때 비석에 글자를 새긴 사람이다.
절에서 비를 세울 때 스님들이 글자를 새기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 후
대에 불경 목판을 새길 때에도 스님들이 글자를 새긴 경우가 많았고, 조선
시대에는 유학자들의 문집을 간행할 때 절에서 한지를 만들거나 목판을
새기는 일이 흔하였다. 목판 한 장을 제작하는 비용이 오늘날 가격으로 4
백만원 정도였으니 절의 재정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번창하던 실상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1468년 세조世祖(1455-1468) 14년
에 화재로 모두 불타버린 후 200여 년 동안 폐사가 된 채로 거의 방치되었
고, 승려들은 중국의 백장 회해百丈 懷海(749-814) 조사의 이름을 딴 백장
암百丈庵에 기거하면서 겨우 그 명맥을 간신히 유지해왔다. 백장암도 원래
는 백장사로 그에 딸린 당우들도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실상사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숙종肅宗(1674-1720) 때에 와서 전각들이 다수 세워지고 현재
의 극락전極樂殿인 부도전浮屠殿도 지었다.
그러나 1882년(고종 19)에 함양 출신 양재묵楊載默과 산청 출신 민동혁閔
東赫이 절터를 빼앗으려고 절에 불을 질러 절이 소실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
고,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를 받던 시기에는 불상에 보물들이 많이
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