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6 - 고경 - 2021년 10월호 Vol.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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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용이 여러 면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반청反靑 감정이 한편으로는 명에 대
          한 문화사대적 사상을 강조하였고, 한편으로는 명에 밀접히 연계되어 있던
          자기 전통과 자기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화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

          러므로 중국은 과거의 중화가 될 수 없다는 사상이 중국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한국사의 주체적 체
          계화의 작업이 적극 활발하게 되었고, 그것이 정통론이라는 형식을 밟아
          표출되었던 것이다.

           둘째, 기존 역사서에 대한 불신이 강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역사서 편

          찬은 “조선의 역사는 풍부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문헌이 온전히 남아 있지
          못하며, 고대와 중세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는 국가의 연혁과 인물들의
          출처를 가히 믿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또한 조선인의 자기 역사인식에 대

          한 무지無知는 종래의 역사서가 부실하다는 지적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유

          득공柳得恭은 승려들이 찬한 고기류古記類와 같은 종래의 역사서는 허황되
          거나 황당하여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승려의 국가관이나 사회
          관·수행관은 유교의 실천 윤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결국 당시

          는 비록 일반 역사서가 신라의 불교사를 취급했다 하더라도 척불론적斥佛

          論的 입장에서 신라의 불교를 다루었다. 불교에 관한 풍부한 사료를 무시하
          고, 불교에 관계되는 기사는 그 시초만을 쓰거나 그 심한 것만을 들어 부
          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자 했다.

           셋째, 조선의 문화 전통 강조와 불교사 복원이다. 한치윤은 비록 “종래

          의 고기류古記類가 승려들에 의해서 서술되어 그 내용을 믿을 수 없고 소
          략하다.”라는 비판으로 일관했지만, 자국사에 대한 체계화와 복원을 염두
          에 두었다. 예컨대 그들의 역사인식과 편찬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중국사와

          대등하게 그 시종始終이 전개되고 있으며, 문화 전통 또한 중국에 비해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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