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4 - 고경 - 2021년 10월호 Vol.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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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釋志」는 한치윤의 사론史論이기도 한 ‘안설按說’ 17개와 조카 한진서
          의 ‘근안謹按’ 2개가 있다. ‘안설’은 소략한 본문을 보완해 주는 역할뿐만 아
          니라 내용상의 오류를 지적하고 바로잡았다.




              a.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태조太祖가 안화선원安和禪院을 지
              어 대광大匡 왕신王信의 원당願堂으로 삼았고, 예종睿宗이 이를 중
              수하여 안화사安和寺로 만들었으니, 대개 안화사는 비록 태조 때

              처음으로 지어졌으나, 안화사로 이름 지어진 것은 실로 예종 때에

              비롯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보면, “안화사는 송악松
              嶽의  자하동紫霞洞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이인로李仁老의  『파한
              집破閑集』에는, “절에 대송大宋 황제가 ‘신한문宸翰門’이라고 친히 편

              액扁額을 쓴 다음 채경蔡京에게 명해 문에 걸게 한 것이 있으며, 단

              청이나 지은 모양새가 아주 교묘하여 우리나라에서 으뜸간다.”라
              고 하였으니,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이른바, “절의 편액은 바로 태
              사太師 채경蔡京이 쓴 것이며, 신한문宸翰門과 능인전能仁殿이라고

              쓴 두 편액은 금상今上 황제의 어서御書이다.”라고 한 것은 이를 두

              고 한 말이다.


              b. 만력 9년에 고려에서 (살펴보건대, 고려는 마땅히 조선으로 해야 한다.) 존

              천尊天 24신, 아라한 108신을 올렸는데 모습이 아주 이상하였다.



           인용문은 『고려도경』에 수록된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에 대한 기사를 우
          리나라 기록인 『고려사』·『동국여지승람』을 통해 보완하였고, 조선을 고려

          로 표기한 『춘명몽여록春明夢餘錄』의 기록을 지적하고 바로잡았다. 「석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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