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0 - 고경 - 2021년 12월호 Vol.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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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역사 인식이나 광범위한 자료 수집과 치밀한 고
          증 등 실학적 연구방법론에 경도된 이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
          한 것이다. 아암혜장兒庵惠藏(1772-1811)과 초의의순草衣意洵(1789-1866) 스님

          등 『대둔사지』 찬술자들은 『죽미기』에 수록된 대둔사의 창건과 그 시기, 삼

          국의 영토 문제, 그리고 연대 표기의 오류와 창건주에 관한 문제부터 의상
          이나 원효스님 등 스님들의 일대기를 적고 있는 승전僧傳에 이르기까지 사
          적기의 전반적인 내용을 망라하여 강도 높게 비판했다.




              a. 대둔사의 구적舊蹟은 병선兵燹으로 잃어버리고 숭정崇禎 말년에
              『죽미기』를 지으니 이설異說이 분흥紛興하여 후생들이 의혹될 곳이

              있다.(『대둔사지』 권2)



              b. 색성賾性이 살펴보니 『죽미기』는 서산대사의 친도親徒인 중관해
              안이 지었다.……그때 중관은 지리산에 있으면서 오직 대둔사 승

              려의 근거 없는 말만 듣고서 이렇게 적었다.(『대둔사지』 권2)



           이들은 『대둔사사적』이 전란으로 이미 소실된 이전의 대둔사 사적기를
          복원한 것이지만, 후생들로부터 의혹을 살 만큼 그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
          는 것이다. 초의의순 스님은 심지어 『죽미기』가 “저잣거리의 잡설을 모두

          모아 놓으니 앞으로 어떤 것을 가려서 써야 할지 모르겠으며, 그 내용이 엎

          치락뒤치락 헤아리지 못할 것이 한둘이 아니니 이치에 합당할 리가 없다.”
          라고 혹평했다. 그러므로 『대둔사지』 전반에 걸쳐 보이는 29회의 『대둔사
          사적』에 대한 비판 기사는 이전에 찬술된 사적기와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사

          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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