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1 - 고경 - 2021년 12월호 Vol.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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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의 『죽미기』 비판과 『대둔사지』 찬술은 또 다른 동기를 지니고 있
었다. 대둔사가 조선 후기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관련된 문제로 『대
둔사지』 편찬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첫째, 대둔사의 12종사宗師와 12경사經師의 배출은 대둔사가 조선 후기
불교계의 교학敎學을 발흥시키는 산실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대둔사는
“모든 요사寮舍에 각각 방장실方丈室을 두고 불경을 몸에 지니고 공부하는
자가 살도록 하고, 혹간에 명예가 혁혁한 강사講師가 있으면 모셔와 배우
는 이로 하여금 잘 모시게 하는 강회講會”의 전통이 있었다. 대둔사는 대승
경전을 중심으로 강회, 대회, 법회가 빈번히 열렸는데, 특히 『화엄경』의 연
구는 그 오류를 바로잡고 대화엄강회大華嚴講會·화엄대법회華嚴大法會 등
을 열어 화엄사상의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시켰다. 상월새봉霜月璽篈(1687-
1766) 스님이 주최한 1754년(영조 30) 선암사仙巖寺 화엄강회는 모두 1,287
명이 참석한 대규모 강회로 전국의 승려들이 일제히 모일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둘째, 대둔사는 임진왜란과 그 이후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대둔사로 전
해지고, 조정의 명으로 표충사表忠祠가 건립되면서 단순히 서산문도의 종
원宗院만이 아니라 조선불교의 중흥지로서의 면모를 지니게 된다. 이와 같
은 조선 후기 대둔사의 두드러진 변화는 격상된 대둔사의 위치를 부각시
킬 『대둔사지』 편찬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죽미기』가 비록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전란으로 소실된 대둔사의 역사를 밝히는 데 훌륭한 저
본의 구실을 해주었고, 찬자들의 자료 발굴과 검토는 광범위하고도 면밀
하게 이루어졌다. 유나維那인 윤훤允烜이 “문적文跡이 소략한 것은 대둔사
의 수치다. 그러므로 찬지撰志를 힘써서 구한다.”라고 한 것은 대둔사가 당
시 불교계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의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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