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6 - 고경 - 2022년 3월호 Vol. 107
P. 126
에 대한 70여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유배 이전에는 다른 유학
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람과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독서의 장소로서 사찰을
이용한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개인적인 신앙심이나 교리연구의 자세는 파
악하기 어렵다. 또한 대부분 불교계의 부정적인 측면이나 피폐상을 읊고
있어 유배 이전 그의 불교관은 당시 다른 유학자들의 그것과 뚜렷한 차이
를 보이고 있지 않다.
1783년 그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789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 갑
과甲科에 급제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체포되
던 때까지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
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경기암행
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
旨,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등
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성
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대체로 조선에 왕조
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
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때문에 선진유학先秦儒學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의 이론을 일찍부
터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다산의 경세관經世觀은 불교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다산과 불교의 인연
다산이 불교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된 계기는 1795년 중국인 신부 주
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