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 - 고경 - 2022년 3월호 Vol.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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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던 것들이 바로 보이기 시작하고, 지금 서 있는 이 지점이 곧 도착지라
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가 곧 축제의 현장이라서 보이는 것마다 소반 가
득 진수성찬이고, 들리는 것마다 공기를 출렁이게 하는 음악 소리다. 여기
에서 인연의 리듬에 맞춰 노래하고 춤추는 데 유감이 없다면 축제로서의
그의 삶은 완성된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정말 이렇게만 된다면 종교도 필요 없고 불교도
필요 없겠지만 욕망의 집요한 관성이 우리를 재촉한다. 나만이 최고로 인
정받는 자아의 왕국을 향해 거듭 나아가도록 갈망의 순환 열차를 추동한다.
그리하여 고통의 쳇바퀴 속 질주가 멈추지 않는다. 이 갈망의 순환 열차를
움직이는 에너지원이 바로 나를 세우고 대상을 나누는 분별심이다.
분별심은 그 자체가 어린 왕자의 바오밥나무와 같아서 본래 완전한 이 삶
의 행성을 조각낸다. 수행자들은 이것을 치우기 위해 혹은 잎을 따내고, 혹
은 가지를 치고, 혹은 줄기를 자르는 방식으로 수행을 하고 그만큼의 효과
를 거두어 자유를 구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뿌리가 남아 있는 한 분별심의
바오밥나무는 다시 무성하게 자라나 부처의 행성을 뒤덮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성철선은 분별과 집착을 뿌리째 뽑아내는 무심의 완전한 성취에
전체를 건다. 그것은 수행의 의지와 지향을 갖는 일 자체까지 문제 삼을 정
도로 철저하다. 수행의 의지와 지향이라는 바로 그것이 일종의 세련된 유
심에 속하기 때문이다. 원래 불교에서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선행을 닦
거나,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친다. 또 생멸의 원리를 관찰
하거나, 자아를 내려놓거나, 바름을 닦도록 가르친다. 그 각각은 고통의
바다를 벗어나도록 이끄는 훌륭한 길 안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거기
에는 닦는 주체가 있고,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다. 수행의 주체와 지
향이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유심의 틀 속에서 일어나는 유심의 뒤범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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