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3 - 고경 - 2022년 3월호 Vol.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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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히 미세하다는 것은 이것이 일어나는 것을 감지하기 어렵다는 뜻이기
도 하다. 눈 밝은 스승이 필요한 이유이다. 바른 스승을 만날 수 없다면 그
것을 판정할 정확한 잣대라도 필요하다. 끊어내고자 하는 것이 아뢰야의
최심층 근본무명이므로 그것은 최소한 다음의 질문을 담은 잣대라야 한다.
첫째, 망념의 단절이 표층의식의 차원에서 충분히 완결되었는가? 중층의
잠재의식 차원에서는 어떤가? 나아가 심층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어떤가?
이것이 바로 성철선의 세 관문이다. 아무리 견해가 밝고 경계가 새롭다
해도 의식의 차원에서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진여와의 통일이 한
결같은지(동정일여), 꿈의 차원에서 역시 그러한지(몽중일여), 꿈조차 없는 차
원에서 또한 그러한지(숙면일여)를 자문해 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스스
로 취해야 할 마음 자세가 분명해지리라는 것이다.
“보잘것없는 견해로 괜한 오기 부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 6추뿐
아니라 3세의 미세망상까지 완전히 떨치고 오매일여, 숙면일여의
경계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견성이다.”
그런데 좀 기가 질리지 않는가? 참선에 매진하여 삼매를 체험했다 해도
그게 아니다. 선사들의 수작이 무슨 일인지 알게 되고, 자신도 끼어들어 한
마디 할 준비가 되었다 해도 그게 아니다. 일상생활의 현장은 물론 꿈에서
까지 부처님 마음과 하나로 만나는 무심에 도달했다고 해도 그게 아니다.
심지어 꿈조차 없는 숙면의 상태에서 한결같다 해도 그것조차 통과해야 할
관문이지 목적지가 아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성철선의 세 관문은 시작도
하기 전에 물러서도록 만드는 철벽 방어의 관문이 될 수도 있다. “과연 우
리에게도 그 몫이 있을까?” 낙망과 회의가 일어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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