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고경 - 2022년 4월호 Vol.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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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판각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지역적으로 춥고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1593년부터 40년간은 절강성浙江省 경산徑山의 만수선사萬壽禪寺 적조암寂
照庵과 화성사化城寺 등에서 주로 판각하였다.
경산으로 내려온 후 자백진가와 밀장도개의 입장 차이 등 크고 작은 사
건으로 대장경 사업도 혼란을 빚게 되었고, 경전 판각도 각지에 분산되었
다. 1640년대 이후에는 그때까지 대장경을 인쇄하고 판매한 수입을 가지
고서 사업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 대장경 판매 유통의 중심지가 절강성 가
흥부嘉興府 능엄사楞嚴寺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가흥장은 명대
만력 연간부터 시작하여 청대 강희 연간까지 백여 년 가까이 판각이 이어
졌고, 방책장方冊藏, 경산장徑山藏, 능엄사판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가흥장은 대장경의 정장正藏뿐만 아니라 중국 역대 고승과 거사들의 저
술을 추가하여 대략 2천여 부[종], 1만여 권이 판각되었다. 특히 명말청초
4대 고승인 운서주굉雲棲袾宏(1535~1615), 자백진가, 감산덕청憨山德淸
(1546~1623), 우익지욱蕅益智旭(1599~1655) 등의 저술이 다량 포함되어 있어
문헌적 가치가 높다.
가흥장의 국내 전래
국내에 가흥장 불서가 전래된 계기는 조선 숙종 7년(1681)에 중국 상선이
전라도 임자도荏子島 근처에서 난파되었는데, 이때 표류한 선박에서 흩어
진 책이 바로 가흥장 불서였다. 이 선박은 가흥장을 싣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국 무역선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중국의 가흥장을 수입해 복각하여 황
벽판黃檗板 대장경(1669~1678)을 자체적으로 만들고 있었을 때였다. 표류된
불서로 인해 황벽판 대장경의 나머지 판각 사업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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