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2 - 고경 - 2022년 5월호 Vol.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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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대만 중앙학연구원 호적기념관 건물들. 사진. 동광.


          의는 철학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은 세계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개선해 나가는 데 도움을 주는 일종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진리는 없으며, 구체적인 문제점을 개선해 나가는 과정만 의
          미가 있다는 것이다. “실험주의는 일종의 방법, 문제를 연구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방법은 세심하게 사실에 근거하여 대담하게 가설을 제

          출하며, 다시 세밀하게 논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첫째는 대담한

          가설, 둘째는 세심한 논쟁”이라고 요약되는 ‘십자진언十字眞言’이다. 실제
          당시 학술계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이 간단한 십자진언이었고, 웅십력도 이
          를 인정할 정도였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을 취한 호적은 혁명을 통해 사회문제를 단번에 해

          결할 수 있다는 입장에 반대하고, 점진적 개혁주의자의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태도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당연히 반발하였다. 이 같은 입장 때
          문에 호적은 공산당과 원수가 되었고, 국민당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

          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호적과 국민정부 사이에 합의가 이루

          어지고, 1938년에서 1942년까지는 주미 중국대사를 역임하고 1945년에
          북경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1948년에는 대만 국민당 정부의 부총통을 역임하였고, 1949년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57년에는 대만 정부의 국제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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