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8 - 고경 - 2022년 5월호 Vol. 109
P. 148
니 유적 참배라
는 목적으로 도
항해 인도 체험
은 더 이상 새
로운 것이 아니
었다. 오히려
그 열기가 사그
사진 4. 18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만국종교회의. 라지는 시점이
었다.
그의 송별회에 참석한 지인은 그의 도항에 대해 ‘갑작스러운’이란 표현
을 썼다. 즉, 소우엔의 유학(혹은 체험)은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닌 급하게 결
정된 사항이었다. “지금의 인도는 옛날의 인도가 아니다. 석가모니의 가르
침은 쇠퇴했고 볼만한 것이 없다.”는 지인들의 물음에 소우엔은 합당한 답
변을 내놔야 했다. 불교유적지 참배라는 적당한 이유는 통용되지 않았다.
그는 스승과 지인들에게 “전문적으로 범학梵學을 배우려고 한다.”는 그럴
싸한 답변으로 모두를 설득시켰다. 목적지 역시 스리랑카가 아니어도 됐
다. 포괄적인 인도 체험이었고, 스리랑카로 구체화된 것은 그의 후원자인
도리오 고야타의 편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컸다.
소우엔의 경우, 가벼운 체험으로 시작된 도항은 오히려 전문적인 유학
으로 바뀌었다. 1887년 3월 31일 콜롬보에 도착한 후 스리랑카로 들어가
빨리어를 배우고 승원에서 수행했다. 다시 사미로 출가해 판냐케투라는 법
명을 받았다. 이곳에서 상좌부 불교와 스리랑카의 불교 및 당시 영국령이
었던 스리랑카의 식민지의 생활 등을 면밀하게 살폈다. 스리랑카 체제 중
에 간행한 『서남西南의 불교』(1889)에서 북방불교와 남방불교라는 이분법을
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