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7 - 고경 - 2022년 10월호 Vol.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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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를 위산으로 보냈다. 6)
여기에 보이는 문답을 분석한다면, 다양한 선사상을 논할 수 있지만, 무
엇보다도 화림의 패인은 ‘출격의 말 한마디’를 단지 명칭을 바꾼 것으로 대
응하였기 때문이다.
위산에 동경사 창립
백장의 명에 따라 영
우는 대위산으로 가서
교화를 하자 사람들이
몰려와 사찰을 건립하
였는데, 연수連帥(‘연連’은
10국을 의미하고, ‘연수連帥’
는 10개 지방을 통솔하는 대
장군을 뜻함)인 이경양李 사진 4. 위산영우 선사가 창건한 동경사 전경.
景讓이 황제에게 상주하여 ‘동경사同慶寺’의 명칭을 하사받았으며, 당시 상
국相國인 배휴裴休가 영우를 참알하여 담론하였고, 이로부터 영우의 이름
이 천하에 떨치게 되어 세상에서는 ‘위산영우潙山靈祐’라고 칭하게 되었다.
후에 회창법난會昌法難이 발생하자 영우는 동경사를 떠나 피했다가 선
종宣宗이 법난을 해금하자 당시 호남관찰사로 있던 배휴가 숨어지내는 영
6) 앞의 책(大正藏51, 264c), “百丈是夜召師入室, 囑云: 吾化緣在此. 潙山勝境汝當居之嗣續吾宗廣
度後學. 時華林聞之曰: 某甲忝居上首, 祐公何得住持? 百丈云: 若能對衆下得一語出格當與
住持. 卽指淨甁問云: 不得喚作淨甁, 汝喚作什麽? 華林云: 不可喚作木也. 百丈不肯, 乃問
師, 師蹋倒淨甁. 百丈笑云: 第一坐輸却山子也. 遂遣師往潙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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