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2 - 고경 - 2023년 1월호 Vol.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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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불교와 민간신앙의 융합이라는 이름하에 도교의 흔적이 사찰 안에 남
아 있다(사진 2).
봉은사의 재산 문제는 복잡했다. 절에 희사한 사람들의 공덕을 기리는
공덕비가 서 있다. 고종 시기에도 땅의 소유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았는데
흥선대원군이 나서서 이런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봉은사의 땅을 되찾아 주
었다. 그래서 봉은사 경내에는 흥선대원군을 기리는 영세불망비가 서 있
다. 고종 시기에 고종과 민비, 흥선대원군은 그 누구보다 불사에 전력을 기
울였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그 시간에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풍전등
화風前燈火와 같은 나라를 더 생각했으면 조선이 멸망하는 것을 막을 수 있
었으리라(사진 3).
봉은사는 동호독서당에서 공부하
던 엘리트들이 자주 원족을 하던 곳이
기도 했지만, 왕실 원당이 있기도 하
여 왕실의 보호를 받는 곳이기도 했으
니 서울과 지방을 오가던 선비들이 여
기에서 서로 만나거나 송별을 하던 장
소이기도 했고, 암행어사가 복명復
命을 앞두고 최종 보고서를 손질하던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퇴계선생은 문과에 급제한 후 1539
년 홍문관 수찬으로 있다가 중종으로
부터 독서당에서 사가독서의 은택을
받았는데, 이미 이 당시 어지러운 심사
사진 3. 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 를 비치는 그의 시 한 수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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