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 - 고경 - 2023년 1월호 Vol.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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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은 부처, 현주소는 중생


           그래서 우리는 이중의 주소를 갖는다. 본적은 부처이지만 현주소는 중

          생이다. 이치적으로는 부처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중생이다. 왜인가? 이

          유는 각자에게 있다. 우리 각자는 완전한 부처를 품고 있음에도 엉뚱한 딴
          살림을 차리고 있다. 분별과 집착을 내용으로 하는 생각이 그 살림의 주체
          다. 분별의식과 잠재의식과 심층 무의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이 생각은

          허상의 세계를 만드는 데 선수다. 동서남북도 이것이 만든 것이고, 시비선

          악, 행복과 불행도 이것이 만든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와 ‘세상’을 분별하여 다양한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생각
          이다. 거기에는 바탕을 이루는 작용이나 착한 작용들도 있고, 크고 작은 번

          뇌와 착하지 않은 작용들도 있다. 이것들이 층층의 장벽을 만들어 부처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잃고[迷] 헤매고 있다[惑]. 이
          미혹에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전도된 견해와 잘못된 집착의 미혹[見思惑], 공
          의 이치에 집착하며 다양한 현상의 차별성에 어두운 미혹[塵沙惑], 인지하

          기 어려운 미세한 무명의 미혹[無明惑]이 그것이다. 이것들이 겹겹의 담장

          이 되고, 그 담장들이 미로를 만들어 부처를 향한 접근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를 보려면 이 층층의 담장을 깨야 한다. 요컨대 부처를 보
          는 공부는 담장을 깨트리는 공부다. 자아의 담장을 깨고, 관념의 담장을

          깨고, 모든 패러다임의 담장을 깬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최초 가르침인

          중도와 사성제의 실천이 내려놓음과 깨트림을 본질로 삼는 것도 그 때문
          이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공정이지만 부지런히 두드리다 보면 이 장벽들
          이 조금씩 부서지거나 단번에 무너지는 일이 일어난다. 그렇게 담장이 다

          무너진 자리에 부처가 온전히 드러난다. 어떻게 보면 중생 살림이 무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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