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8 - 고경 - 2023년 1월호 Vol.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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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마음이 밝아져 먹던 약까지 버렸음에도
병에서 회복되었다. 그 후 좋은 선지식을 만나 불교 공부가 깊어졌고, 발
심하여 선방에서 대중과 더불어 정진도 잘 했다. 나아가 수좌 도반과 함께
봉암사를 정화하여 구산선문과 결사의 전통을 잇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했
다. 더구나 1971년 도장산 심원사에서 좌선 중에 깨달아서 돈오점수頓悟漸
修의 돈오를 했다고 자신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출가 수행자의 길에 대한 번
민과 갈등이 남아 있었다고 하니 뜻밖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관한 자세한 이
야기는 뒤에 다시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구산선문과 결사도량의 전통을 복원하다
1977년 봉암사 주지를 맡은 고우스님은 봉암사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선원禪院을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희양산 봉암사는 통일신라 후기 헌강
왕 5년(879)에 지증도헌(824~882) 국사가 심충거사의 시주로 건립한 선종
사찰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희양산문의 본
찰이 봉암사다. 이후 고려 태조 18년(935)에 정진(878~956) 국사가 중창하
였는데, 고려 초기에 도봉원, 고달원과 함께 희양원은 3대 국찰國刹로 사
격이 커졌다.
고려 후기 공민왕대에는 왕의 명으로 태고보우(1301~1382) 국사가 두 번
이나 주지가 되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의 제
자인 함허(1376∼1433) 스님이 주석하며 『금강경오가해』를 지은 참으로 유
서 깊은 선찰이다.
현대에 와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중심이 되었는데, 바로 1947년 봉암
사 결사 때문이다. 성철, 자운, 보문, 우봉 네 스님이 오직 ‘부처님 법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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