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0 - 고경 - 2023년 4월호 Vol.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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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을 설치했고, 이듬해(1877)에는
부산에서도 포교활동을 개시했다.
중국은 오구루스가, 조선은 오쿠무
라 엔신奥村円心이 담당했고, 이들
의 성과는 오쿠보에게 보고되었다.
즉, 메이지 초기의 동본원사 포교
활동은 오쿠보 도시미치의 의향이
깊게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포교승들은 현지인들과
함께 일본인 거류민들 역시 포교의
대상으로 삼았다. 메이지 초기의
사진 4.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1871년 샌프
란시스코 방문 당시.
주요활동은 설법과 불사, 장례, 의
료, 교육, 묘지관리 등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메이지 후반에
이르면 이러한 포교내용은 현지인이 아닌 거류민들로 대상이 바뀌게 된다.
시문 교류와 서적 배부를 통한 중국 포교
메이지 10년(1877) 10월 4일, 핫카가 상해 별원에 도착해서 맡은 업무는
종무와 일본인 유학생 감독, 서적 자료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핫
카는 청말 거사불교의 중심에 있던 양인산楊仁山을 접견하고 그에게 런던
에서 유학하고 있는 난조 분유南條文雄를 소개했다. 또한 핫카와의 교류를
통해 불교신자가 된 소주의 허령허許霊虗 등을 만났다. 허령허는 이후 오구
루스 코쵸의 『진종교지眞宗敎旨』를 자비로 복각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중국[청] 조정으로부터 정식적인 포교활동을 허락받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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