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0 - 고경 - 2023년 5월호 Vol.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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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거기에서 깊은 정감이 생겨납니다. ‘가시는 걸음걸
          음 / 놓인 그 꽃을 /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이 한마디는 실로 사람
          을 아연하게 만듭니다. 시인이 뿌려 놓은 진달래꽃이 마치 비수처럼 빛납

          니다.

           하지만 사랑은 원래 쉬 변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단지 세월이 흐른 뒤
          문득 뒤돌아봤을 때 아련한 그리움만 남는 것,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
          니었나요? 생사와 이별은 삶에서 가장 큰 일이지만 우리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벚꽃 잎이 떨어지는 속도



           일본에서는 벚꽃을 두고 수많은 시와 노래, 그림과 이야기가 풍부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벚꽃은 어렴풋한 흔적을 남기며 생멸하는 시각적 은유입
          니다. 벚꽃은 일본 문화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그리고 어쩌면 가장 상투
          적인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신카이 마코토(1973~)는 한 여성 팬으로부터 이런 메일을 받았

          습니다.
           “알고 계신가요? 초속 5센티미터. 벚꽃 잎이 떨어지는 속도.”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2007)는 이 한 통의 메일로 시작되었습니

          다. 나중에 실제 벚꽃 잎이 떨어지는 속도는 그보다 훨씬 빠르다는 게 밝

          혀졌지만, 이 제목이 주는 로맨틱함을 살려 영화로 만들었고 다 아시는 바
          와 같이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매년 벚꽃은 기껏 일주일 정도 핍니다. 갑자기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섬세한 분홍빛 꽃은 금세 다 지고 맙니다. 이 짧은 시간을 즐기기 위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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