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0 - 고경 - 2023년 5월호 Vol.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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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山形·니가타新潟를 거치면서 1만 명 이상의 개척단과 막대한 자금을
          확보했다. 동본원사는 개척사업을 판화로도 제작해 홍보했는데, 이는 종
          무 기구 개혁을 요구하는 개혁파의 주장을 일시적으로나마 억제하는 효과

          가 있었다.

           오구루스는 교단의 상황을 설명받고 홋카이도 개척이 진종 포교에 도움
          이 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오타니 코에이를 수행해 홋카이도 개척에 참
          여했다. 홋카이도 개척에 대해, “이 사업은 천년에 걸친 국가의 치적이고

          우리 종단이 재흥할 기회이다. 사람들은 모두 막대한 자금이 소요될 것을

          걱정하고 있다. 내가 안을 내자면 스스로가 동북지방의 모든 단월들을 방
          문해서… 이는 종단을 위한 것이다. 누군가가 분발 흥기해야 한다.”라고
          코에이에게 진언하고 이를 직접 수행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홋카이도 개척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개혁의 요구 역

          시 봉쇄하지 못했다. 이듬해(1871~72) 구세력과 개혁파가 종정의 주도권을 놓
          고 크게 격돌했고, 오구루스의 홋카이도 개척도 여기에서 막을 내렸다.



            중국불교의 재인식



           오구루스는 본격적인 중국 포교에 앞서 1873년(43세)에 중국 유학을 떠
          났다. 상하이와 텐진을 경유해 북경에 도착한 그는 용천사龍泉寺에 머무르

          면서 중국어를 배웠다. 북경 체재 중에 『북경기사北京紀事』·『북경기유北京

          紀游』·『지나개종견입支那開宗見込』 등을 저술했다.
           당시 중국불교의 현황은 오구루스가 일본에서 막연히 동경하고 상상했
          던 것과는 상이했다. 상하이에서 북경까지 오구루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서양인과 그리스도교의 위세였다. 상하이에는 큰 사찰은 없고 대신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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