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9 - 고경 - 2023년 5월호 Vol.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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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겐뇨상인 홋카이도 순석회도現如上人北海道巡錫絵図」(1870) 일부. 홋카이도 개척 모습을 홍보하기 위
해 동본원사가 제작한 포교판화.
명령에 순응한 듯 보였다. 홋카이도 개척은 동본원사에 있어서도 양날의
검이었다. 장기적으로는 교세를 확장하는 이점이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그 어떤 성과도 얻을 게 없었다. 더해서 조죠지增上寺 등도 개척하라는 명
을 받았지만, 개척사업에는 뛰어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본원사가 이 일을 착수한 데에는 메이지 정부를
향한 충성심 표시 이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종단 내 개혁파의 비판
을 잠재우기 위한 측면도 컸다. 당시 정토진종 서본원사가 빠르게 교단
개혁에 착수한 것과 달리, 동본원사는 여전히 봉건세력이 강했다. 오타
니 코에이는 홋카이도 개척사업을 통해 구세력을 잠재우고 개혁파를 치
켜세워 내외적으로 동본원사가 개혁노선을 걷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자
했다. 이는 구세력과 개혁파, 양측으로부터 집행부에 대한 비판을 피하
려는 의도가 컸다.
1870년 2월, 100여 명의 개척단이 교토에서 출발했다. 이후 도쿄·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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