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4 - 고경 - 2023년 7월호 Vol.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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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운의 학창시절 최고의 성과는 좋은 스승들 밑에서 수학한 것이다. 분
          가쿠료 시절에는 교토대학 교수가 된 사카키료 사부로榊亮三郎[산스크리트어 담

          당]나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최고의 기자가 된 스기무라 소진칸杉村楚人冠[영어 담
          당]을 만났다. 이외에도 중앙공론中央公論을 창간한 우메하라 토오루梅原融,

          인도학자이자 도쿄 제국대학 교수가 된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郎 등이 포
          진해 있었다. 이 중 카이운 생애에 큰 영향을 끼친 스기무라 소진칸과 우메

          하라 토오루를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 카이운의 인생관인 국리민복國利民福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행복] 역시 분가쿠료 시절에 형성된 것이다.



                            “스기무라 선생님은 원래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지만, 나에게는 마치 부모님처럼

                               행동하셨다. 후에 아사히 신문사로 이직해 저

                               명한 기자가 되었고, 근대 저널리즘의 개척
                               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내가 중국이나 몽골에
                              서 활동하고 있을 때도, 일본에 귀국해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시종일관 나를 이끌어 주셨다. 그
          사진 3.  스기무라  소진칸
              (1872~1945).  가 나를 위해 소개해 준 일류의 전문가들은 셀 수 없

              을 정도로 많다. 스기무라 선생님은 내 인생의 스승이다.”

                                       - 미지마 카이운 『나의 이력서』(1980) 중에서-



           불교대학에 진학한 카이운은 결론적으로 졸업을 하지 못했다. 우메하라
          토오루의 소개로 나카지마 타츠유키中島裁之가 중국 북경에 설립한 동문학
          사東文學社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25세). 나카지마 역시 분가

          쿠료 출신으로 동문학사 운영에는 서본원사가 관련되어 있었다. 카이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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