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6 - 고경 - 2023년 9월호 Vol.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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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하는 거죠. 글을 쓰지 않
          는다고 해서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높은 수준의 고감도 책을 읽음으
          로써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좋은 책은 읽고 나면 읽은 사람의 얼굴이 달라집니다. 기분이 좋아져서

          얼굴이 환하게 빛납니다. 지금 이대로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것은 일종의 황홀감입니다. 내가 쓰는 글이 읽는 이들의 얼굴을
          얼마나 환하게 할 수 있을까요? 생각하면 오십 년이 넘도록 글을 썼는데,

          참 부끄럽습니다. 지금은 내가 쓰는 글이 그저 내 얼굴이라도 환히 밝혀준

          다면 좋겠습니다.


            차 한 잔




           누워서 책을 읽다가 조금 처지는 것 같아서 차를 한 잔 우립니다. 집에
          서는 찻자리를 식탁 위로 옮겼습니다. 찻자리는 분수에 맞게 조촐합니다.
          비싼 물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비싸고 아름다운 기물이야 물론 좋지만 나

          는 흥 없이 편안한 게 좋습니다.

           혼자 차를 마실 때도 동작 하나하나를 제멋대로 하지는 않습니다. 물을
          끓이고, 찻잎을 덜고, 차를 우려냅니다. 팔을 뻗고, 손을 내밀며, 주전자
          손잡이를 잡는 등 모든 동작을 평소보다 조금 천천히 합니다. 찻잔을 들어

          올릴 때 찻잔 속에서 찻물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잔의 테두리가 입술에

          닿는 느낌을 알아차리려고 합니다. 차를 마시는 중에 손에 들린 찻잔은 의
          식하지 못한 채, 다른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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