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0 - 고경 - 2023년 9월호 Vol.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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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면 차 마시고 밥 먹고 옷 입을 뿐
                                      불법에 다른 비결은 없다는 뜻입니다. 여
                                       기에서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행위는

                                        단순히 표층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

                                        니라 불법이라는 심층의 스크린에 비
                                        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범부는 이렇게 무심으로 차를 마시기

                                     어렵습니다.  다만  차를  마시면서  그저

                                   긴장을  풀고  편안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사진 5.  아무 일 없이 마시는
                   한 잔의 차.         충분히 행복한 일입니다. 김시습(1435~1493)
          은 아무 일 없는 그런 행복을 노래한 집구集句 를 남겼습니다.
                                               5)



              산은 아지랑이 낀 햇빛으로 엷게 물들었는데
              사립문은 대숲 사이의 방을 허술하게 가려주네
              세간에선 안락을 청복으로 삼지만

              나는 차 달이며 평상에 앉았다네           6)



           이 시는 네 명의 시에서 한 구절씩 취해서 다시 배열했을 뿐이지만, 뭐
          라 말할 수 없는 담박한 분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야말로 스크린처럼

          산중 생활을 무심하게 그려냅니다. 비록 아무것도 없는 산중 생활이지만

          시인은 무엇을 더 욕망하거나 숨기거나 꾸미는 것이 없어서 편안합니다.



          5) 옛사람이 지은 글귀를 모아서 만든 시.
          6)  『梅月堂詩集』 卷之七 山居集句 其二十八 : 山染嵐光帶日黃 柴門空掩竹間房 世間安樂爲淸福 聊
           爲煎茶一據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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