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 - 고경 - 2023년 11월호 Vol.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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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배를 하고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마음은 알 수 없는 설렘으로 충만했
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불기자심不欺自心의
가르침은 소납의 좌우명이 되었고, 50여 년의 풍상을 이어주는 견고한 법
연法緣의 고리가 되었습니다.
1993년 11월 4일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
았습니다. 큰스님의 빈 자리를 어떻게 채울지, 어떻게 해야 스님의 뜻을 받
들어 정법을 펼 수 있을지 고심하며 동분서주하는 사이, 어느덧 30년의 세
월이 훌쩍 흘렀습니다. 무상신속無常迅速이라는 옛 조사들의 말씀처럼 시간
은 쏜살같이 흘러 소납도 어느덧 팔순을 맞았습니다. 큰스님의 열반 30주기
를 맞이하여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큰스님의 법향法香에 취해 50여 년의 세
월을 한나절같이 살아온 것 같아 감회가 새롭습니다.
퇴옹당 성철 종정 예하께서는 봉암사 결사를 통해 한국불교가 나아갈 길
을 보이셨고, 해인총림 초대 방장과 대한불교조계종 제6·7대 종정으로 추
대되어 수행 가풍을 진작하시니 조계종은 마침내 반석 위에 올라섰습니다.
장좌불와의 치열한 수행으로 간화선의 선풍을 드날리셨고, 선과 교를 종횡
으로 아우르며 백일법문을 설파하시니 해인사 대적광전은 마치 소주 대범
사와 같았고, 정법을 배우려는 학인들은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선문
정로』와 『본지풍광』을 통해 정법의 당간지주를 우뚝 세우시니 비로소 선문
의 바른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큰스님의 열반 30주기를 맞이하여 어떻게 해야 뜻깊은 추모행사가 될지
를 놓고 여러 날 고심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큰스님께서
현창하시고자 했던 선문禪門의 바른길을 널리 알리는 것이 문도의 도리라
고 생각했습니다. 성철 큰스님은 돈오돈수를 통해 선종의 종지를 바르게
정립하는 것을 일생일대의 과업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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