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2 - 고경 - 2023년 11월호 Vol.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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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기신노트』와도 다르고, 대승경전은 물론 아
                              함부까지 포함하여 그 공통된 의의를 설파한 『백일
                              법문』과도 다르다.

                                『선문정로』에서 행하는 부정은 안과 밖을 향해

                              함께 일어난다. 안을 향해 일어나는 부정이란 선
                              수행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중간적 성취에 대한
                              부정이다. 이러한 내적 부정과 함께 불교의 핵심
         사진 5. “ 부처님께 밥값 했다.”
              고  자평한  『선문정    교리에 대한 교학적 해석을 부정하는 외적 부정
              로』(장경각, 1981).
                              을 실천한다. 예컨대 견성이 일어나는 지점에 대
          한 교설의 부정이 그렇다. 천태교학이나 이통현李通玄 장자의 화엄교학에
          서는 견성이 10주초에 일어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에 대해 성철스님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10주초의 견성은 원인

          이지 결과는 아니므로 진정한 견성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펴보면 『선문정로』의 전체 법문이 핵심교리와 관련된 교학적
          논의에 대한 선적 차원의 재검토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이

          론과 체험 사이의 운명적 간극을 생각할 때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인해 『백일법문』에서 『선문정로』로 넘어가면서 미세한 차이
          가 일어난 부분이 여럿 보인다. 돈오점수의 비판에 해오점수라는 표현을

          추가한 것, 아뢰야식 차원의 무심을 대무심이라고 했다가 이것을 가무심假
          無心으로 표현하여 그 배격의 입장을 분명히 한 점, 돈오점수의 핵심에 해

          당하는 오후보임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다가 ‘보임무심’이라는 새로운 용
          어를 창안하면서까지 그것이 구경각을 성취한 대해탈인의 살림살이라는
          것을 최대의 편폭을 할애하여 논의를 전개한 점, 제7말나식을 설정해야 한

          다는 원효의 견해를 수용했다가 그것을 따로 논할 필요가 없다는 현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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