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9 - 고경 - 2024년 1월호 Vol.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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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윤회尹淮(1380~1436) 선생이 지은 「백련사기白蓮寺記」
             에 그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백련사는 외적으로부터 침탈을 자주 당해온
             터라 행호화상은 절 둘레에 토성도 쌓아 절의 방비에도 힘썼다. 현재도 그

             토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세종이 즉위한 후 행호화상은 판천태종사判天台宗師로 되었다. 세종은 처
             음에 배불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친불로 돌아서는데, 태조의 원찰인 흥천
             사興天寺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여 국가가 직접 관리하였다. 왕의 지원으로

             행호화상은 선종의 총본산인 흥천사의 주지를 맡아 당대 불교계를 주도하

             였다. 물론 왕실에서는 효령대군이 불교에 적극적이었고, 설법으로 유명
             한 늙은 니승 사실師室도 존경하여 재원을 모아 불사를 적극 지원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정인지鄭麟趾(1396~1478) 등 신하들은 불교가 왕실에 점점 확

             산되는 것을 우려하여 상소를 올려 왕실의 분위기를 쇄신할 것을 간하기

             도 하였다. 세종은 처음에는 효령대군의 호불적인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
             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그대로 두었다.
               아무튼 왕실은 점점 친불적인 태도로 바뀌어 가고 이를 우려하는 신하

             들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는 상황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왕실의 지원으로

             불교의 영향력을 키워 가던 행호화상은  유교세력의 표적이 되어 결국 제
             주도에 유배되어 장살杖殺되고 말았다. 그 이후 조선시대에 고승이 제주도
             로 유배되어 살해되는 사태는 나암보우懶庵普雨(1515~1565) 국사와 환성지

             안喚醒志安(1644~1729) 화상에게서도 반복된다.



                백련사의 전각과 산내 암자



               백련사의 누각은 그 후에 허물어졌는데, 효종孝宗(재위 1649~1659) 때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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