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1 - 고경 - 2024년 1월호 Vol. 129
P. 141

두 글씨에도 뛰어났다. 일본에서는 주자학의 흐름과 달리 나가에도쥬(中江
             藤樹, 1608~1648)가 양명학을 제창하여 전개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러던 것이 그간에도 많이 허물어져 1800년대 『만덕사지』를 편찬할 당

             시에는 1761년에 건립한 대웅전, 극락전, 나한전, 시왕전, 진여문과 화재

             에 살아남은 비전碑殿, 판전, 약사전, 관음전만 남아 있었다. 만경루에 걸
             려 있던 현판은 다행히 살아남아 진여문에 달아놓았다. 행호화상이 중건
             한 후 330여 년이 지난 절의 모습은 이렇게 초라하게 되어 버렸다. 만경루

             가 있었던 터는 만경대萬景臺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산의 유배와 불교와의 인연



               다산선생은 1801년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으로 강진으로 유배를 오

             게 되는데, 다산에는 1808년부터 머물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 이전에는 불
             교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불교에 관
             하여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다산에 머물기 시작한 후 다산 선

             생은 해마다 꽃이 피는 계절이면 천인, 천책, 정오 세 국사를 기리며 그들

             이 주석하던 석굴인 용혈암龍穴菴에 자주 가곤 했는데, 절벽을 따라 흘러내
             리는 용천龍泉과 풀이 난 암자의 옛터에 초석만 남아 있고 능허대凌虛臺, 초
             은정招隱亭은 무너지고 없었다고 했다. 한 시절 치열하게 살다 간 대사들과

             그들에게서 불법을 배우고자 몰려들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실로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이다. 백련사에 속한 많은 암자들은 대부분 폐허가 되었고,
             인근 완도와 청산도에 낡은 당우가 몇 개 남아 있었다.








                                                                         139
   136   137   138   139   140   141   142   143   144   145   146